이낙연·황교안 종로 빅매치설… 여당 강세 속 사직·평창은 野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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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 지역민심] 전통의 ‘정치1번지’ 종로[서울신문]
인구 16만 소도시지만 거물 정치인 다수
정세균 의원 연승… 김영종 구청장 3선
사직·평창동 한국당 강세… 정권 심판론
청와대 있어 현직 대통령 인기 큰 영향
집회 잦아 일부 주민은 “정치 혐오 커져”
“최근 추세처럼 더불어민주당 계열 후보가 강세를 이어 갈 겁니다” VS “요즘 살림살이가 팍팍하니 자유한국당에 표를 몰아줘야겠어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2위를 달리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황교안 한국당 대표 간 맞대결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통적인 정치1번지인 서울 종로구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인구 16만 4257명인 미니 도시 종로는 지정학적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가졌고 윤보선·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박순천 전 민주당 총재 등 거물급 정치인들의 지역구였다. 11~18대 총선까지 한국당 계열 후보들이 약진했으나 최근에는 진보 진영으로의 쏠림현상이 뚜렷하다. 실제로 2016년 20대 총선 당시 17개 행정동 중 사직·평창 두 곳을 제외한 15개동에서 민주당 정세균 후보가 선승했다. 구청장을 뽑는 지방선거는 지난해 치러진 7대까지 민주당 소속인 김영종 구청장이 내리 3회 연속 당선됐다.
지난 8일 종로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직 두 총리의 출마설에 관심을 나타내면서도 당에 대한 선호도에 주목했다. 사직동, 평창동 등 한국당 강세가 뚜렷한 지역 주민들은 민주당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사직동에서 만난 자영업자 박모(67)씨는 “여당이 소득주도 성장이니 뭐니 해서, 서민들만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있는 종로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와 연결 지어 후보를 선택하는 경향도 있다. 효자동에서 만난 직장인 김모(36)씨는 “종로의 위치상 현직 대통령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직 국회의원이자 총리 후보인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지역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그동안 지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반면 통의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모(40)씨는 “요즘 살림살이가 팍팍한 게 좀 달라져야 할 때라고 본다”면서 “여당보다는 야당에 표를 몰아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청와대 앞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연일 이어지는 집회로 동네에서 편히 지내기가 어렵다며 정치 혐오를 이야기하는 주민도 많았다. ‘경희궁의 아침’ 등 오피스텔이 밀집한 내수동에서 만난 취업 준비생 장모(28)씨는 “품격 없는 막말과 비난을 퍼붓는 청와대 인근 이념 집회를 보고 있으면 정치 혐오감만 커진다”면서 “전통의 정치1번지답게 선거에서 표로 심판하겠다”고 말했다. 통의동 한 주민은 황 대표의 경우 용산, 구로, 금천 등 타 지역 출마 검토 보도가 나오는 것과 관련, “인물보다는 당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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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 지역민심] 전통의 ‘정치1번지’ 종로[서울신문]
인구 16만 소도시지만 거물 정치인 다수
정세균 의원 연승… 김영종 구청장 3선
사직·평창동 한국당 강세… 정권 심판론
청와대 있어 현직 대통령 인기 큰 영향
집회 잦아 일부 주민은 “정치 혐오 커져”

지난해 기준 인구 16만 4257명인 미니 도시 종로는 지정학적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가졌고 윤보선·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박순천 전 민주당 총재 등 거물급 정치인들의 지역구였다. 11~18대 총선까지 한국당 계열 후보들이 약진했으나 최근에는 진보 진영으로의 쏠림현상이 뚜렷하다. 실제로 2016년 20대 총선 당시 17개 행정동 중 사직·평창 두 곳을 제외한 15개동에서 민주당 정세균 후보가 선승했다. 구청장을 뽑는 지방선거는 지난해 치러진 7대까지 민주당 소속인 김영종 구청장이 내리 3회 연속 당선됐다.
지난 8일 종로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직 두 총리의 출마설에 관심을 나타내면서도 당에 대한 선호도에 주목했다. 사직동, 평창동 등 한국당 강세가 뚜렷한 지역 주민들은 민주당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사직동에서 만난 자영업자 박모(67)씨는 “여당이 소득주도 성장이니 뭐니 해서, 서민들만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있는 종로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와 연결 지어 후보를 선택하는 경향도 있다. 효자동에서 만난 직장인 김모(36)씨는 “종로의 위치상 현직 대통령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직 국회의원이자 총리 후보인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지역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그동안 지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반면 통의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모(40)씨는 “요즘 살림살이가 팍팍한 게 좀 달라져야 할 때라고 본다”면서 “여당보다는 야당에 표를 몰아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청와대 앞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연일 이어지는 집회로 동네에서 편히 지내기가 어렵다며 정치 혐오를 이야기하는 주민도 많았다. ‘경희궁의 아침’ 등 오피스텔이 밀집한 내수동에서 만난 취업 준비생 장모(28)씨는 “품격 없는 막말과 비난을 퍼붓는 청와대 인근 이념 집회를 보고 있으면 정치 혐오감만 커진다”면서 “전통의 정치1번지답게 선거에서 표로 심판하겠다”고 말했다. 통의동 한 주민은 황 대표의 경우 용산, 구로, 금천 등 타 지역 출마 검토 보도가 나오는 것과 관련, “인물보다는 당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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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백제 흔적을 찾아 떠난 전북 익산 여행
백제 부흥 꿈 담은 미륵사지와 석탑
무왕이 살았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배후에 미륵산에도 흔적 남아
[익산(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북 익산. 옛 이름은 이리(裡里)다. 속(안)으로 들어간 마을이란 뜻이다. 이리도 원래 이름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솜리’라고 불렸다. 이를 일제강점기에 한문 형식으로 바꾸다 보니 이리가 됐다. 왜 익산이 속마을, 혹은 안마을로 불렸는지는 미륵산에 올라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정상에 서면 어마어마하게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전주와 완주, 익산 등이 이 너른 들녘에 깃들어 있다. 너른 들녘의 안쪽에 들어서 있는 마을이 바로 익산이다. 고대 국가 백제 무왕도 이 들녘을 발판 삼아 부흥을 꿈꿨다. 그 흔적을 찾아 익산으로 향한다.
◇ 국내 현존 최고·최대의 석탑과 조우하다
백제의 유적지라면 부여와 공주를 꼽는 게 보통이다. 익산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적지 않다. 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 유적은 거의 전부가 무왕 때의 것이다. 무왕은 신라로 들어가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세기의 로맨스를 벌였던 서동. 그가 바로 무왕이다. 그는 백제 법왕이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미륵산 남쪽 아래에는 무왕의 흔적이 있다. 바로 미륵사지(사적 150호)와 왕궁리유적이다. 미륵사는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사찰 중 최대규모였다. 이 절터에 그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있다. 익산에서 알려진 명소를 꼽자면 이 석탑을 가장 먼저 손꼽을 정도다. 무왕은 아마 이 거대한 탑을 품은 미륵사를 짓고 백성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석탑은 미륵사에 세운 3기의 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탑이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최대(最大)의 석탑이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절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의 기록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이 미륵사지를 지은 내력을 이렇게 말한다. “무왕이 어느 날 부인과 함께 미륵산의 절집 사자산에 향을 올리러 가다가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상을 발견한다. 가마를 멈추고 예를 올린 무왕은 ‘이곳에다 큰 절을 세우기 원한다’는 아내의 청을 허락한다.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에게 절 짓기를 청하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깎아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 땅에다 불전과 탑, 회랑을 각각 3곳에 세웠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사람을 보내 절 짓기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무왕의 부인이 바로 선화공주라고 단정한 것이다.
2009년 1월, 이 모든 사실을 뒤엎는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 해체복원 중이던 미륵사지 석탑에서 석탑 조성과정을 적은 금판을 발견한 것. 금판에는 미륵사 석탑을 조성한 이가 ‘639년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늘 사실처럼 붙어 다니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거기에 없었다. 사택 씨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 신라 공주가 사택 왕후일 수는 없었다. 이 발굴로 선화공주가 가공인물이라는 주장이 유력해졌지만, 무왕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됐다. 미륵사의 3개 절터와 석탑은 각각 시차를 두고 지었다는 주장이다. 세개의 탑 중 하나는 사택적덕의 딸이 지었고, 다른 두 탑 중 하나는 선화공주가 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루지 못한 무왕의 꿈,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현재의 미륵사지에 옛 모습의 탑은 없다. 동서쪽에 2개의 9층 석탑이 있었고, 그 가운데 우람한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10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동탑도 복원하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조품처럼 보인다. 서탑은 일제강점기 때 땜질하듯 시멘트로 발라놓았다가 지난 2000년 붕괴위기에 처하지 대대적인 해체 보수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미륵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왕궁면 왕궁리에 무왕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이 있던 자리가 있다. 바로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이다.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지명이 아닐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왕궁터에 사찰을 세운 독특한 유적이다. 18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르는 왕궁의 규모와 담장뿐 아니라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금과 유리를 가공, 생산했던 공방터, 화장실 유적을 발굴했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이 탑은 사찰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탑이 세워진 시기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대가 어떻든 8.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이 석탑은 왕궁리 유적을 사방으로 돌아가며 둘러봐야 제맛이다. 특히 서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석탑의 실루엣이 가히 장관이다.
무왕의 흔적은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에도 남아 있다. 산 정상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암. 내비게이션에 사자암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약 20분 정도 가녀리게 솟은 이대 숲을 따라 올라가면 미륵산 정상 바로 아래에 사자사가 있다. 이 사자사 자리가 무왕 부부가 다녔던 사자암이 있던 자리다. 사자암에서 내려다보는 미륵사지와 익산 들녘의 풍광도 멋있지만, 더 멋진 전망을 보겠다면 정상까지 오르면 된다. 정상에서는 미륵사지의 전경과 함께 익산 땅의 장쾌한 전망도 함께 조망할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미륵산성에도 들러야 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시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익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왕은 나라의 중심을 익산으로 옮기려 했고, 수도를 방어할 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어진 게 바로 미륵산성이라는 것이다. 성의 둘레는 1.8㎞ 남짓. 전체 성곽 중 3분 1 정도만 복원됐지만,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대단하다.
◇여행메모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익산교차로에서 720번 지방도로를 타고 익산 쪽으로 5.4㎞ 가다 보면 금마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금마고 좌회전하면 삼례를 거쳐 전주 가는 길이다. 호남고속도로 논산교차로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연무, 여산을 거쳐 금마로 갈 수도 있으며, 삼례교차로로 나와 역시 1번 국도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여행팁= 오는 10일 익산국립박물관이 문을 연다. 개관을 기념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를 볼 수 있는 특별전시회가 11일부터 3월29일까지 열린다. 무려 55년만에 익산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사리장엄구는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보수를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한 것. 2000년대 이후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강경록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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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 꿈 담은 미륵사지와 석탑
무왕이 살았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배후에 미륵산에도 흔적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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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북 익산. 옛 이름은 이리(裡里)다. 속(안)으로 들어간 마을이란 뜻이다. 이리도 원래 이름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솜리’라고 불렸다. 이를 일제강점기에 한문 형식으로 바꾸다 보니 이리가 됐다. 왜 익산이 속마을, 혹은 안마을로 불렸는지는 미륵산에 올라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정상에 서면 어마어마하게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전주와 완주, 익산 등이 이 너른 들녘에 깃들어 있다. 너른 들녘의 안쪽에 들어서 있는 마을이 바로 익산이다. 고대 국가 백제 무왕도 이 들녘을 발판 삼아 부흥을 꿈꿨다. 그 흔적을 찾아 익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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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현존 최고·최대의 석탑과 조우하다
백제의 유적지라면 부여와 공주를 꼽는 게 보통이다. 익산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적지 않다. 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 유적은 거의 전부가 무왕 때의 것이다. 무왕은 신라로 들어가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세기의 로맨스를 벌였던 서동. 그가 바로 무왕이다. 그는 백제 법왕이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미륵산 남쪽 아래에는 무왕의 흔적이 있다. 바로 미륵사지(사적 150호)와 왕궁리유적이다. 미륵사는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사찰 중 최대규모였다. 이 절터에 그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있다. 익산에서 알려진 명소를 꼽자면 이 석탑을 가장 먼저 손꼽을 정도다. 무왕은 아마 이 거대한 탑을 품은 미륵사를 짓고 백성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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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탑은 미륵사에 세운 3기의 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탑이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최대(最大)의 석탑이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절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의 기록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이 미륵사지를 지은 내력을 이렇게 말한다. “무왕이 어느 날 부인과 함께 미륵산의 절집 사자산에 향을 올리러 가다가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상을 발견한다. 가마를 멈추고 예를 올린 무왕은 ‘이곳에다 큰 절을 세우기 원한다’는 아내의 청을 허락한다.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에게 절 짓기를 청하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깎아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 땅에다 불전과 탑, 회랑을 각각 3곳에 세웠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사람을 보내 절 짓기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무왕의 부인이 바로 선화공주라고 단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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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이 모든 사실을 뒤엎는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 해체복원 중이던 미륵사지 석탑에서 석탑 조성과정을 적은 금판을 발견한 것. 금판에는 미륵사 석탑을 조성한 이가 ‘639년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늘 사실처럼 붙어 다니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거기에 없었다. 사택 씨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 신라 공주가 사택 왕후일 수는 없었다. 이 발굴로 선화공주가 가공인물이라는 주장이 유력해졌지만, 무왕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됐다. 미륵사의 3개 절터와 석탑은 각각 시차를 두고 지었다는 주장이다. 세개의 탑 중 하나는 사택적덕의 딸이 지었고, 다른 두 탑 중 하나는 선화공주가 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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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무왕의 꿈,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현재의 미륵사지에 옛 모습의 탑은 없다. 동서쪽에 2개의 9층 석탑이 있었고, 그 가운데 우람한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10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동탑도 복원하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조품처럼 보인다. 서탑은 일제강점기 때 땜질하듯 시멘트로 발라놓았다가 지난 2000년 붕괴위기에 처하지 대대적인 해체 보수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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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왕궁면 왕궁리에 무왕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이 있던 자리가 있다. 바로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이다.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지명이 아닐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왕궁터에 사찰을 세운 독특한 유적이다. 18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르는 왕궁의 규모와 담장뿐 아니라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금과 유리를 가공, 생산했던 공방터, 화장실 유적을 발굴했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이 탑은 사찰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탑이 세워진 시기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대가 어떻든 8.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이 석탑은 왕궁리 유적을 사방으로 돌아가며 둘러봐야 제맛이다. 특히 서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석탑의 실루엣이 가히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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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흔적은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에도 남아 있다. 산 정상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암. 내비게이션에 사자암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약 20분 정도 가녀리게 솟은 이대 숲을 따라 올라가면 미륵산 정상 바로 아래에 사자사가 있다. 이 사자사 자리가 무왕 부부가 다녔던 사자암이 있던 자리다. 사자암에서 내려다보는 미륵사지와 익산 들녘의 풍광도 멋있지만, 더 멋진 전망을 보겠다면 정상까지 오르면 된다. 정상에서는 미륵사지의 전경과 함께 익산 땅의 장쾌한 전망도 함께 조망할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미륵산성에도 들러야 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시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익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왕은 나라의 중심을 익산으로 옮기려 했고, 수도를 방어할 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어진 게 바로 미륵산성이라는 것이다. 성의 둘레는 1.8㎞ 남짓. 전체 성곽 중 3분 1 정도만 복원됐지만,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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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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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록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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